레슬리 뉴비긴 Lesslie Newbigin : 예배는 파송으로 완성된다

들어가며
주일 예배를 마친 성도는 월요일 아침 어디에 서 있습니까? 레슬리 뉴비긴(Lesslie Newbigin, 1909–1998)의 신학은 예배를 이 질문에서 다시 보게 합니다.
뉴비긴은 인도에서 선교사와 감독으로 일한 뒤, 이미 포스트기독교 사회가 된 영국으로 돌아와 “서구 문화 안에서 복음은 어떻게 전해지는가”를 평생의 질문으로 삼았습니다. 이 글은 그의 생애와 세 가지 핵심 주장을 정리하고, 그것이 예배와 예배 미디어, 온라인 예배에 던지는 질문을 살핍니다.
왜 지금 한국 교회에 필요한가
한국갤럽의 『한국인의 종교 1983~2025』에 따르면 2025년 성인 가운데 종교가 있다는 응답은 40%, 그 중 개신교인은 18%였습니다. 종교인 비율은 2004년 54%에서 2025년 40%까지 줄었고, 20대는 같은 해 45%에서 24%로 내려갔습니다. 갤럽은 지난 20여 년간 종교인 감소의 주된 원인이 청년층, 곧 젊은 교인의 신규 유입 감소와 기존 교인의 이탈에 있다고 설명합니다. 개신교인 중 60대 이상이 차지하는 비율은 34%입니다. 한국리서치의 2025년 조사는 개신교 20%로 수치가 다르지만, 종교 인구의 고령화가 구조적인 위험 신호라는 진단은 같습니다.
이 숫자는 한국 교회가 더 큰 예배당을 짓고 더 좋은 프로그램을 만드는 것만으로는 풀리지 않는 질문 앞에 서 있음을 보여 줍니다. 뉴비긴이 1974년 영국에서 마주한 질문과 닮았습니다. 교회가 사회의 중심에서 물러난 뒤에도 복음이 믿을 만한 것으로 전해지려면 교회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한국 사회의 변화가 영국과 같은 경로를 밟는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이 질문을 빌려 올 이유는 충분합니다.
여기에 한국 교회에 익숙한 틀이 있습니다. 선교를 교회의 여러 사역 가운데 하나로 이해하고, 선교부서를 만들어 위임하는 방식입니다.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는 이 틀 안에서 선교를 더 열심히 하라는 요청이 아닙니다. 교회가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요청입니다. 이 질문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새로운 용어만 얻고 체계는 그대로 남기 쉽습니다.
왜 예배를 새롭게 기획해야 하는가
뉴비긴은 복음이 믿을 만한 것이 되는 길을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회중에서 찾았습니다. 이 논리를 따르면 회중이 만들어지는 자리가 중요해지고, 한국 교회에서 회중이 가장 많이 모이는 자리는 예배입니다. 예배를 어떻게 기획하느냐가 성도를 어떤 사람으로 형성하느냐와 이어진다는 뜻입니다.
예배의 목표가 출석 인원과 모인 사람들의 경험에 맞춰져 있다면 성도는 예배의 소비자로 길들여지기 쉽습니다. 예배의 목표가 월요일의 삶의 자리로 보내지는 것이라면 성도는 증인으로 세워집니다. 새로운 기술이나 화려한 형식을 더하자는 말이 아니라, 예배를 설계하는 질문의 방향을 모임에서 파송으로 바꾸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 글은 뉴비긴의 생애와 주장을 정리한 뒤, 예배의 흐름과 예배 미디어, 온라인 예배를 이 질문으로 다시 살펴봅니다.
키워드: 선교적 교회 · 복음의 공공성 · 회중이 곧 해석학 · 다원주의 비판
생애와 시대적 맥락

뉴비긴은 1909년 12월 8일 영국 뉴캐슬 어폰 타인에서 태어나 1998년 1월 30일 세상을 떠났습니다. 삶의 흐름은 다음과 같습니다.
| 시기 | 사건 |
|---|---|
| 1933–1936 | 케임브리지 웨스트민스터 칼리지에서 목회 훈련 |
| 1936 | 7월 스코틀랜드교회 목사 안수, 9월 인도 마드라스로 출발 |
| 1947 | 남인도교회(Church of South India) 출범, 마두라이·람나드 감독으로 성별 |
| 1959 | 국제선교협의회(IMC) 총무 취임 |
| 1961 | IMC가 세계교회협의회(WCC)와 통합. 이후 WCC 세계선교와전도부 초대 국장으로 제네바에서 1965년까지 활동 |
| 1965–1974 | 인도로 돌아와 마드라스 감독 역임 후 은퇴, 영국으로 귀국 |
남인도교회는 성공회, 장로교, 감리교, 회중교회 전통이 하나로 합쳐진 교회였고, 뉴비긴은 그 설립 과정의 핵심 인물이었습니다. 이 경험이 그에게 교회 일치와 선교신학에 대한 깊은 통찰을 주었습니다.
1974년 귀국한 뉴비긴이 마주한 영국은 그가 떠날 때와 달랐습니다. 교회는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났고, 복음은 사적 신앙의 영역으로 축소되어 있었습니다. 이방 문화 한복판에서 복음을 증언하던 선교사의 질문이 이제 자기 나라 안에서 다시 필요해진 것입니다. 이 역설적 귀환이 그의 후기 신학 전체를 이끄는 질문이 됩니다.
주요 저작으로는 『오픈 시크릿』(The Open Secret, 1978),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Foolishness to the Greeks, 1986),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1989)이 있습니다.
1974년의 영국: 선교사가 돌아온 선교지
뉴비긴이 1974년에 돌아온 영국은 그를 인도로 보냈던 영국과 달랐습니다. 이 낙차를 알아야 그의 후기 신학이 왜 “선교”라는 말로 쓰였는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두 교회의 대비
인도의 교회는 규모가 작아도 낙관적이고 복음 전도에 적극적인 태도를 지녔습니다. 반면 영국의 교회는 자기 메시지와 선교적 소명에 대한 뚜렷한 이해가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 세대 전 선교사를 파송하던 교회가 이제는 스스로 다시 선교의 대상이 되어 있었습니다.
숫자로 본 분위기
| 지표 | 수치 | 비고 |
|---|---|---|
| 성공회 유아 세례 비율 | 1950년 67% → 1973년 47% | 휴 맥리오드(버밍엄대학교) |
| 성공회 교인 명부(선거인 명부) | 1960~1973년 약 3분의 1 감소 | 휴 맥리오드 |
| 일요일 예배에 참석한 성인 비율(잉글랜드) | 1979년 9% | 피터 브라이얼리 조사, 클라이브 필드 인용 |
| 교회 교인 비율 | 1980년 13% | 종교미디어센터 영국 세속화 팩트시트 |
학자들의 해석은 갈립니다. 맥리오드는 1960년대의 변화를 종교개혁에 비길 만한 단절로 보고, 영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자기 이해에서 다원적이고 탈기독교적이며 세속적인 사회로 옮겨 갔다고 설명합니다. 필드는 정기적인 예배 출석이 이미 1960년대 이전부터 낮아져 있었고, 1960~70년대의 추가 감소는 극적이지 않았다고 봅니다. 어느 쪽이든 교회가 사회의 주변부에 놓여 있었다는 점은 같습니다.
뉴비긴이 본 것
숫자보다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분위기였습니다. 뉴비긴은 영국에서의 사역이 인도에서 만난 어떤 것보다 어렵다고 썼습니다. 복음에 대한 노골적인 반대보다 복음을 아예 진지하게 다루지 않는 차가운 경멸이 더 대하기 힘들다는 것이었습니다(자서전 『아직 끝나지 않은 길』, Unfinished Agenda). 그는 영국을 이교적 사회로 보았고, 이 강고한 이교와의 진정한 선교적 만남을 교회의 가장 큰 실제적 과제로 여겼습니다.
윈슨 그린 교회에서
뉴비긴은 귀국 후 버밍엄의 셀리 오크 칼리지에서 5년간 강의했고, 이어 윈슨 그린 연합개혁교회(URC)를 맡았습니다. 교도소 맞은편에 있던 120년 된 이 교회는 문을 닫을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지역에는 아시아계 이민 가정이 많았고, 뉴비긴은 젊은 인도인 목사를 청해 함께 집집마다 방문하며 영국이 얼마나 기독교에서 멀어졌는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훗날 연합개혁교회 총회장(1978~1979)도 지냈습니다.
이 경험이 “복음과 우리 문화(Gospel and Our Culture)” 운동으로 이어졌습니다.
핵심 주장 1: 회중이 복음의 해석학이다
뉴비긴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에 나옵니다. 십자가에 달린 한 사람이 인간사의 마지막 말을 하는 권세를 대표한다는 복음이 어떻게 믿을 만한 것이 될 수 있는가? 그가 내놓은 유일한 대답은 그 복음을 믿고 그대로 살아가는 회중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논리적 증명이나 도덕적 호소만으로 전달되지 않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존재 방식을 통해 설득력을 얻습니다. 세상이 교회를 보고 “저 사람들은 다르다”고 느낄 때 비로소 복음이 말을 걸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전도 방법의 문제를 넘어, 교회가 무엇인가에 대한 주장입니다.
뉴비긴은 이런 회중의 모습으로,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를 꼽습니다
그는 복음이 공적 삶에 도전하는 길이 기독교 정당이나 공세적인 홍보 캠페인이 아니라고 보았습니다. 새 창조의 실재가 알려지고 경험되는 지역 회중에서 출발해, 그 회중의 사람들이 사회 각 영역으로 나아가는 움직임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핵심 주장 2: 계몽주의 비판과 복음의 공공성
뉴비긴은 계몽주의가 만든 “공적 진리와 사적 신앙의 분리”를 정면으로 비판했습니다. 서구 사회는 과학과 이성이 검증할 수 있는 것을 공적 사실(public fact)로, 종교적 신앙을 사적 가치(private value)로 나누기 시작했고, 이 이분법이 교회를 사회의 주변부로 밀어냈습니다.
그는 이에 맞서 복음이 영혼 구원의 메시지에 그치지 않고 세상 전체를 향한 공공의 진리 주장(public truth claim)이라고 역설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개인의 취향 표명이 아니라 실재에 대한 선언입니다.
이 비판은 다원주의 사회 분석과 짝을 이룹니다. 뉴비긴이 말하는 다원주의 사회는 문화와 종교, 생활 방식이 다양한 사회를 뜻하는 데서 멈추지 않습니다. 그 다원성을 마땅히 긍정하고 소중히 여겨야 할 것으로 보는 사회입니다.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이 스스로 내건 과제는 이런 문화의 뿌리를 살피고, 그리스도인이 이 지적 풍토 안에서 신앙을 더 확신 있게 긍정하는 길을 제시하는 것이었습니다.
핵심 주장 3: 선교적 교회론
뉴비긴에게 교회는 선교 활동을 하는 기관이기 이전에 본질적으로 선교적인 존재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이 선교하시는 하나님이시고, 교회는 그 하나님의 선교(Missio Dei)에 참여하는 공동체입니다. 이 이해는 훗날 선교적 교회 운동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하나님의 구속하시는 은혜를 가리키는 징표(sign), 도구(instrument), 선취(foretaste)로 설명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 나라 자체가 아니라 그 나라를 가리키고 맛보게 하는 공동체라는 뜻입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가 아니다
“선교적 교회”는 “선교를 열심히 하는 교회”와 같은 말이 아닙니다. 이 둘을 같은 뜻으로 읽는 순간 뉴비긴의 주장은 사라지고, 기존의 구조는 새 이름만 얻은 채 그대로 남습니다.
흔한 이해: 선교는 교회의 사역 중 하나다
이 이해에서 교회는 예배, 교육, 구제, 선교 같은 여러 사역을 운영하는 조직입니다. 선교는 그중 한 항목이고, 선교부서를 세워 위임하며, 전문 인력과 예산이 그 부서로 모입니다. 나머지 성도는 기도하고 헌금하는 후원자가 됩니다. 이 구조에서 선교는 “누가 가는가”의 문제입니다.
뉴비긴의 이해: 선교가 교회를 교회 되게 한다
뉴비긴에게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삼위일체 하나님입니다. 성부가 성자와 성령을 보내시고, 교회는 그 보내심 안으로 들어간 공동체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가 하는 일이기 이전에 성령이 하시는 일입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통치를 가리키는 징표, 도구, 선취로서 역사 한가운데 살아갑니다. 교회는 본성상 선교적이며, 선교 활동의 유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심으로 존재가 규정된다는 뜻입니다.
“존재론적”이라는 말의 뜻
존재론적이라는 말은 교회가 무엇을 하는가보다 무엇인가를 묻는다는 뜻입니다. 여기서 세 가지가 달라집니다.
- 선교는 사역 목록의 항목이 아니라 모든 사역의 성격입니다. 예배, 교육, 교제, 구제, 행정이 모두 보내진 공동체의 일로 읽힙니다. 사람의 몸에 호흡 담당 부서를 따로 두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비유).
- 선교의 주체는 부서가 아니라 회중 전체입니다.
- 선교의 현장은 먼 곳이 아니라 회중이 매일 사는 삶의 자리입니다. 뉴비긴 자신이 인도에서 돌아와 한 일도 새 부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윈슨 그린의 회중과 함께 이웃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앞서 본,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라는 회중의 모습과 이어집니다.
이는 해외 선교를 폐기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뉴비긴 본인이 선교사였습니다. 다만 선교를 일부 전문가와 부서의 몫으로 넘기는 구조가 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답이 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두 모델의 비교
| 항목 | 선교부서에 위임하는 이해 | 뉴비긴의 선교적 교회 |
|---|---|---|
| 선교의 주체 | 교회, 구체적으로 선교부서와 선교사 | 삼위일체 하나님, 교회는 참여자 |
| 교회의 정체성 | 여러 사역을 운영하는 조직 | 보내진 공동체, 선교로 규정되는 존재 |
| 성도의 위치 | 후원자, 기도와 헌금 | 보냄받은 증인 |
| 선교의 장소 | 해외, 또는 전도 대상 지역 | 직장, 가정, 학교, 이웃 |
| 예배와 선교 | 별개의 두 사역 | 예배는 파송으로 완성됨 |
| 평가 기준 | 파송 선교사 수, 선교 헌금액, 행사 | 회중이 삶의 자리에서 드러내는 증언 |
겉핥기를 가려내는 질문
세미나와 책으로 선교적 교회를 배우고도 체계는 그대로인 경우가 많습니다. 다음 질문으로 점검해 볼 수 있습니다.
- 부서 이름만 바꾸었을 뿐 위임 구조와 예산 구조는 그대로인가?
- 선교를 “누가 가는가”로만 말하는가, 모든 성도가 월요일에 보내진 존재로 훈련받는가?
- 선교 보고가 숫자와 행사 중심인가, 성도의 삶의 자리 이야기를 담고 있는가?
- 예배, 교육, 구제를 평가할 때 “보내진 공동체로서 어떠한가”라는 질문이 들어가는가?
- 배운 뒤에 달라진 것이 프로그램 목록인가, 회중의 일상인가?
선교적 교회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새 부서를 세우는 일이 아니라 “우리는 누구인가”를 다시 묻는 일입니다.
예배는 파송으로 완성된다
뉴비긴의 논리를 따라 예배를 읽으면, 예배는 성도의 내적 충전 시간에 머물지 않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의 통치가 이 세상에 실재함을 공동체가 함께 선포하고 몸으로 살아내는 사건입니다. 앞서 본 것처럼 뉴비긴은 회중을 세상에서 제사장직을 수행하도록 준비되고 지탱되는 공동체로 그립니다. 모이는 예배와 흩어지는 삶은 하나의 흐름 안에 있습니다.
성경도 이 연결을 보여 줍니다.
예수께서 또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 (요 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롬 12:1)
요 20:21은 보내심을, 롬 12:1은 삶 전체를 드리는 예배를 말합니다. 모이는 예배와 흩어지는 삶이 이어져 있다는 뜻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그래서 파송이 없는 예배는 뉴비긴의 관점에서 미완성입니다. 성도는 직장, 가정, 학교, 이웃이라는 각자의 삶의 자리로 보내집니다.
한국 교회는 종종 “모이는 것” 자체에 집중합니다. 주일 출석률, 예배당 좌석 채우기, 등록 교인 수가 교회 건강의 척도가 됩니다. 뉴비긴은 이렇게 되물을 것입니다. “이 예배를 드린 사람들이 월요일의 삶의 자리에서 무엇을 증거하는가?” 예배의 열매는 주일 안에서가 아니라 주중 삶의 현장에서 드러납니다.
예배 미디어와 선교적 형성
예배 미디어를 설계하는 사람은 뉴비긴에게서 구체적인 질문을 받습니다. 우리가 만드는 화면, 음향, 조명, 영상의 흐름이 성도를 어떤 사람으로 형성하고 있는가? 이 모든 것이 성도를 뛰어난 예배의 소비자로 훈련하고 있다면, 뉴비긴의 관점에서 그것은 선교적 형성의 실패입니다.
반대로 예배 미디어가 성도의 삶의 자리를 화면에 담고, 지역사회의 현실을 예배 공간 안으로 가져오고, 파송의 감각을 강화하도록 설계된다면 그것은 선교적 예배 미디어입니다. 예배 마지막에 흐르는 파송 음악, 지역사회를 위한 기도 영상, 성도의 일상 현장을 담은 이미지는 선교적 교회의 가시적 표현이 될 수 있습니다.
아래 표는 고정 설치된 예배 공간의 각 요소에 던질 수 있는 점검 질문입니다.
| 요소 | 점검 질문 |
|---|---|
| 화면·영상 | 예배자를 구경꾼으로 두는가, 삶의 자리와 이웃의 현실을 예배 안으로 가져오는가? |
| 음향 | 말씀·기도·고백이 회중 모두의 것으로 들리는가? |
| 조명 | 시선이 무대의 연출에 머무는가, 공동체 전체를 향하는가? |
| 예배 순서의 끝 | 파송이 화면과 음악으로 분명하게 표현되는가, 광고와 퇴장 음악 사이에 묻히는가? |
이 질문들은 정답이 아니라 설계 회의에서 던질 물음입니다. 기술은 예배를 대신하는 목적이 아니라 회중이 파송받은 존재임을 드러내는 수단이어야 한다는 것이 뉴비긴의 질문이 기술 현장에 주는 방향입니다.
온라인 예배: 문이지 종착지가 아니다
온라인 예배를 설계할 때도 뉴비긴의 질문은 유효합니다. 화면 너머의 시청자가 좋은 콘텐츠를 소비하는 데서 끝나지 않고, 살아 있는 공동체로 초대받고, 그 공동체를 통해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증인으로 세워지는 경험을 하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온라인 예배는 공동체로 들어오는 문이어야지, 공동체를 대체하는 종착지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뉴비긴의 명제로 말하면, 복음을 해석하는 것은 화면이 아니라 회중입니다. 송출 품질이 아무리 좋아도 시청자가 만날 회중이 없다면 복음은 믿을 만한 모습을 얻지 못합니다.
설계 단계에서 다음을 물어볼 수 있습니다.
- 시청자가 예배 이후 연결될 사람과 모임이 분명히 안내되는가?
- 현장 예배자와 온라인 예배자가 같은 공동체로 불리고 있는가?
- 파송의 순서가 시청자에게도 해당하는 말과 장면으로 표현되는가?
현장 점검 질문과 맺음말
우리 교회의 예배에 대고 던져 볼 질문은 다섯 가지입니다.
- 예배의 마지막 장면은 성도를 어디로 보내고 있는가?
- 예배 화면에 우리 지역사회와 성도의 삶의 자리가 담기는가?
- 우리 예배의 성공 기준은 주일 안에 있는가, 월요일의 삶에 있는가?
- 예배 미디어는 성도를 소비자로 길들이는가, 증인으로 형성하는가?
- 온라인 예배는 시청자를 어느 공동체로 초대하는가?
뉴비긴은 복음이 믿을 만한 것이 되는 길을 복음을 믿고 살아가는 회중에서 찾았습니다. 예배는 그 회중이 만들어지는 자리이고, 예배 미디어는 그 자리를 섬기는 도구입니다. 예배가 파송으로 끝나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직 예배의 절반만 설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용어 해설
- 해석학(hermeneutic): 텍스트나 메시지를 이해하고 설명하는 방식. 뉴비긴에게 복음의 해석은 설명이 아니라 회중의 삶으로 이루어진다.
- 선교하시는 하나님(Missio Dei): 선교의 주체가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며, 교회는 그 선교에 참여한다는 이해.
- 공공의 진리(public truth): 복음을 사적 취향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향한 실재에 대한 선언으로 보는 관점.
- 다원주의 사회(pluralist society): 다양성을 인정하는 데서 나아가 그 다원성 자체를 마땅히 긍정해야 할 것으로 여기는 사회.
- 포스트 기독교 사회(post-Christian society): 기독교가 한때 문화의 중심이었으나 더 이상 그렇지 않은 사회.
참고 자료
- 영문판: Lesslie Newbigin,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Grand Rapids: W.B. Eerdmans · Geneva: WCC Publications, 1989.
- 한국어판: 레슬리 뉴비긴, 『다원주의 사회에서의 복음』, 홍병룡 옮김, IVP, 2007년 8월 10일.
- 영문판: Lesslie Newbigin, The Open Secret: Sketches for a Missionary Theology, Grand Rapids: Eerdmans, 1978. 개정판은 The Open Secret: An Introduction to the Theology of Mission, Eerdmans, 1995.
- 한국어판: 『오픈 시크릿』(개정판), 복있는사람, 2012년 4월
- 영문판: Lesslie Newbigin, Foolishness to the Greeks: The Gospel and Western Culture, Grand Rapids: W.B. Eerdmans, 1986.
- 한국어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IVP, 2005년 6월
- 자서전: Lesslie Newbigin, Unfinished Agenda, Geneva: WCC Publications, 1985. 한국어판은 『아직 끝나지 않은 길』, 홍병룡 옮김, 복있는사람, 2011년 7월
- Lesslie Newbigin, Wikipedia
- Newbigin, James Edward Lesslie, Boston University 선교 전기
- Lesslie Newbigin, New World Encyclopedia
- The Gospel in a Pluralist Society, Verbum
- What is church: sign, instrument and foretaste, Peter Carruthers
© 하이테크 예배 신학 연구소 소장 우한별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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